1942년, 알베르 카뮈는 『이방인』을 출간합니다. 소설의 주인공 뫼르소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고, 다음 날 여자 친구와 영화를 보러 갑니다. 그리고 우연히 사람을 죽입니다. 재판정에서 판사는 묻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뫼르소는 대답합니다. "태양 때문이었습니다."
이상한 소설입니다. 주인공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후회하지도, 변명하지도,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일이 일어났을 뿐입니다.
이 소설이 나왔을 때 사람들은 당황했습니다. 하지만 카뮈는 이 소설로 무언가 중요한 것을 말하려 했습니다. 바로 '부조리(l'absurde)'에 대해서.
카뮈는 누구였나
알베르 카뮈는 1913년 알제리에서 태어났습니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의 가난한 동네에서 자랐죠. 아버지는 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했고, 어머니는 청각 장애가 있었습니다. 카뮈는 극빈층 아이였지만, 뛰어난 재능으로 장학금을 받아 공부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결핵으로 죽을 뻔했습니다. 당시 결핵은 불치병이었으니까요. 이 경험이 그의 철학에 큰 영향을 줍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삶. 의미를 찾기도 전에 끝날 수 있는 삶.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카뮈는 프랑스 레지스탕스로 활동했습니다. 나치에 저항하며 비밀 신문을 발행했죠. 전쟁의 참혹함을 직접 목격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의미 없이 죽는 걸 봤습니다.
이런 경험들이 카뮈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 세상에 의미가 있는가? 인간의 삶에 목적이 있는가? 신은 존재하는가?
부조리란 무엇인가
카뮈는 『시지프 신화』의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진정으로 심각한 철학적 문제는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충격적인 문장입니다. 하지만 카뮈에게 이것은 진지한 질문이었습니다. 삶에 의미가 없다면, 왜 사는가?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여기서 카뮈는 '부조리'를 이야기합니다. 부조리란 무엇일까요? 간단히 말하면, 인간과 세계의 불일치입니다.
인간은 의미를 찾으려 합니다. "왜 나는 태어났을까?" "이 일은 왜 일어났을까?" "삶의 목적은 무엇일까?" 우리는 끊임없이 질문합니다. 세상에 질서와 의미가 있다고 믿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침묵합니다. 대답해주지 않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물어도 세계는 그냥 존재할 뿐입니다. 의미도 목적도 설명해주지 않습니다.
이 간극, 이 불일치를 카뮈는 '부조리'라고 불렀습니다. 인간은 의미를 갈망하지만, 세계는 무의미합니다. 이것이 인간 조건의 본질이라고 카뮈는 봤습니다.

시지프, 그래도 행복하다
카뮈는 그리스 신화의 시지프를 이야기합니다. 시지프는 신들을 속인 죄로 영원한 벌을 받습니다.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려야 하는데, 정상에 도달하면 바위는 다시 굴러떨어집니다. 영원히 반복됩니다.
이보다 더 무의미한 노동이 있을까요? 끝이 없고, 성취도 없고, 진전도 없습니다. 그냥 반복입니다. 시지프의 삶은 부조리의 완벽한 상징입니다.
하지만 카뮈는 놀라운 말을 합니다.
"우리는 시지프가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
어떻게 시지프가 행복할 수 있을까요? 영원히 무의미한 일을 반복하는데?
카뮈의 답은 이렇습니다.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습니다. 바위를 밀어 올려도 다시 굴러떨어질 거라는 걸 압니다. 하지만 그는 계속 밉니다. 의미를 찾으려 하지 않습니다. 신들에게 용서를 빌지도 않습니다. 그냥 자신의 바위를,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산 아래로 내려갈 때, 바위를 다시 밀러 가는 그 순간, 시지프는 자유롭습니다. 자신의 운명을 의식하고, 그것을 받아들인 순간. 그는 운명의 주인이 됩니다.
카뮈는 이것이 부조리 앞에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태도라고 봤습니다. 의미를 강요하지 않기. 세상이 답해주길 기대하지 않기. 그럼에도 살아가기.
자살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
카뮈는 부조리를 인정하면서도 자살을 거부합니다. 왜일까요?
자살은 부조리에 대한 도피라고 카뮈는 봤습니다. 의미 없는 세상을 견딜 수 없어서 포기하는 것. 하지만 이것은 패배입니다.
카뮈가 제시한 것은 '반항(revolt)'입니다. 세상에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럼에도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반항입니다.
『시지프 신화』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습니다:
"바위 그 자체가 행복하기에 충분하다."
의미를 찾으려 하지 않아도 됩니다. 세상이 답해주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바위를 밀면 됩니다. 그게 우리의 삶입니다.
뫼르소가 보여준 것
『이방인』의 뫼르소로 돌아가 봅시다. 그는 왜 이방인일까요?
뫼르소는 사회가 요구하는 의미를 거부합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슬퍼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죽였는데 후회하지 않습니다. 재판정에서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내지도 않습니다.
사회는 이것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뫼르소를 괴물이라고 부릅니다. 왜? 그가 의미를 만들어내지 않으니까. 사회가 원하는 감정을 보이지 않으니까.
하지만 카뮈는 뫼르소를 통해 말합니다. 의미를 강요하지 마라. 없는 의미를 만들어내지 마라. 부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뫼르소는 마지막 순간, 사형을 앞두고 깨닫습니다. 세상은 무의미하지만, 그럼에도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충분하다고. 그는 "세상의 부드러운 무관심"을 느끼며 행복해합니다.
카뮈가 말하고 싶었던 것
카뮈의 부조리 철학은 허무주의가 아닙니다. 의미가 없으니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의미가 없기 때문에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내세도 없고, 신도 없고, 궁극적 목적도 없습니다. 그럼 남는 건 뭔가요? 바로 이 순간, 지금, 여기뿐입니다.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말합니다:
"부조리한 인간이 말하는 것은 '그렇다(oui)'이다. 그의 노력은 더 이상 멈추지 않을 것이다."
부조리를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자유로워집니다. 더 이상 거짓 의미를 찾아 헤매지 않아도 됩니다. 세상이 대답해주길 기다리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살면 됩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카뮈가 살던 20세기 중반과 지금은 다른가요? 어쩌면 더 심해졌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의미를 찾으려 합니다. "내 인생의 목적은 뭘까?" "이 일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난 걸까?"
자기계발서는 모든 일에 의미를 부여하라고 합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고통은 성장의 기회", "모든 일은 이유가 있어". 이런 말들로 우리를 위로합니다.
하지만 카뮈라면 이렇게 물을 겁니다. 정말 모든 일에 의미가 있을까요? 아니면 우리가 억지로 의미를 만들어내는 걸까요?
때로는 일이 그냥 일어납니다. 이유 없이, 목적 없이. 좋은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고, 노력해도 실패하고, 계획은 틀어지고, 삶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갑니다.
카뮈는 이것을 인정하라고 합니다. 모든 일에 억지로 의미를 부여하려 하지 말라고. 세상이 대답해주지 않는다고 절망하지도 말라고.
대신 이렇게 살라고 합니다. 의미가 없어도 괜찮다고. 목적이 불분명해도 괜찮다고. 그냥 지금 이 순간을 살면 된다고.
시지프처럼 우리도 매일 바위를 밉니다. 출근하고, 일하고, 집에 오고, 다시 출근합니다. 반복됩니다.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카뮈는 말합니다. 그 바위를 미는 것 자체로 충분하다고. 의미를 찾으려 애쓰지 말고, 그냥 밀면 된다고. 그리고 산 아래로 내려갈 때, 잠시 숨을 돌리며, 이 순간을 느끼면 된다고.
카뮈는 1960년 자동차 사고로 갑작스럽게 죽었습니다. 46세였습니다. 그의 주머니에는 완성하지 못한 소설 원고가 들어 있었습니다.
부조리하지 않나요? 부조리를 평생 고민한 철학자가, 아무 의미 없는 사고로 죽다니.
하지만 어쩌면 카뮈는 이렇게 답할지도 모릅니다. 그래, 바로 그게 부조리야. 그리고 그게 삶이야. 의미 따위 없어. 하지만 그래도 괜찮아. 우리는 시지프가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하니까.